사회가 먼저 변했다…AI는 비어 있던 자리에 도착했다.
- 한국 1인 가구 36.1%, 서울 1인 가구 10명 중 6명은 "외롭다" - 논문 심사 10건 중 2건이 AI 작성…제출 폭증이 만든 '합리적 지름길' - 토론이 사라진 자리에 감정적 양극화가 들어섰다.
AI가 사회를 바꿨다는 이야기는 많다. 그런데 AI가 등장한 뒤 사회의 속살을 다시 들여다보면 다른 장면이 보인다. 외로움은 챗봇이 나오기 전부터 깊어지고 있었고, 논문 심사 시스템은 AI가 쓰이기 전에 이미 한계에 닿아 있었으며, 토론의 자리는 오래전부터 좁아지고 있었다. 이 기사는 AI의 영향이 아니라, AI가 도착한 지점의 사회 구조를 살펴본다.
혼자 사는 사회는 AI보다 먼저 왔다
통계 당국(옛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한국의 1인 가구는 2024년 805만 가구로 전체의 36.1%를 차지했다. 이 비율은 2019년 처음 30%를 넘은 뒤 해마다 1%포인트 안팎으로 늘었다. 서울은 더 두드러진다. 서울시는 2023년 기준 1인 가구가 전체의 40%에 이른다고 밝혔다.
서울연구원이 1인 가구 3,000가구를 조사한 결과 62.1%가 지속적인 외로움을 느꼈고, 13.6%는 힘들 때 기댈 곳이 없는 사회적 고립 상태였다. 4064세 중년 남성의 외로움 응답은 66%로 더 높았다. 통계청의 '2024 사회지표'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는 인구는 18.5%에서 21.1%로 늘었다. 외로움의 원인으로는 1인 가구 증가, 직장·가족 밖 교류의 감소, 성취 지향적 경쟁 문화, 그리고 비교를 부추기는 소셜미디어가 거론된다.
이 숫자들은 모두 대화형 AI가 대중화되기 전의 사회를 보여준다. 이 시기에 이미 한국 사회의 작은 단위, 즉 가구와 이웃, 직장 밖 관계는 헐거워져 있었다.
말 걸 사람이 줄어든 자리에
그 뒤에 청소년들이 챗봇을 찾는 모습이 나타난다. 미국 소아과학회지 JAMA Pediatrics의 2026년 연구는 스트레스를 받을 때 챗봇을 이용하는 청소년·청년이 1년 만에 8명 중 1명에서 5명 중 1명으로 늘었다고 밝혔다. 이용자의 90% 이상이 조언이 도움이 됐다고 답했다.
다만 이를 "AI가 외로움을 만들었다"고 읽기는 어렵다. 온타리오 학생 조사에서 챗봇 사용과 외로움은 함께 나타났지만 방향은 확인되지 않았고, 21일간의 무작위대조시험(183명)에서는 챗봇 대화가 외로움과 인간관계에 전반적 효과를 내지 못했다. 가능한 해석은 이렇다. 말 걸 사람이 줄어든 자리에, 언제든 답하는 상대가 들어온 것이다. 변한 것은 위로의 창구이고, 위로가 필요한 구조는 그 전부터 있었다.
논문 심사가 보여준 '작은 사회'의 균열
토론 문화의 변화는 학계의 논문 심사에서 선명하다. 동료 평가(peer review)는 학자들이 서로의 연구를 무보수로 검토하는 일종의 작은 사회다. 이 시스템에서 올해 큰 사건이 있었다.
AI 탐지 업체 팬그램랩스가 세계 최대 AI 학회 ICLR 2026에 제출된 논문 약 19,500편과 심사평 약 75,800건을 분석한 결과, 심사평의 약 21%가 전적으로 AI가 쓴 것으로 분류됐고 절반 이상에서 어느 정도 AI 사용 흔적이 나왔다. 제출 논문 수는 2017년 500편 남짓에서 2026년 약 1만9천 편으로 불었고, 올해 AAAI는 약 29,000편을 접수해 전년의 두 배가 됐다. 심사위원단도 세 배로 늘었다.
주목할 점은 원인이다. KAIST 연구진 등이 낸 입장 논문은 연구비 확보에 최상위 학회의 잦은 게재가 필요한 구조가 제출 수를 끌어올렸고, 연구자들이 양보다 질을 뒤로 미루며 미완성 원고를 심사받는 '리뷰 쇼핑'까지 낳았다고 분석했다. 한 분석 매체는 AI가 쓴 심사평을 "비합리적인 업무량에 대한 합리적 대응"이라고 표현했다. 즉 심사 붕괴의 뿌리는 AI가 아니라 경쟁과 성과 중심의 구조였다. AI는 이미 한계에 이른 시스템에서 가장 손쉬운 지름길이 됐다.
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겹쳤다. 한 연구에서는 AI 심사자가 사람보다 서로 지나치게 동의하는 '하이브마인드 효과'를 보였고, 논문 속에 AI 심사자를 겨냥해 긍정 평가만 하라는 숨은 지시문을 심는 사례도 보고됐다. 토론과 반론으로 굴러가야 할 제도가 효율을 위해 이견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ICML 2026은 심사자가 원고를 LLM에 올리는 것을 금지하는 강경책을 내놨다.
토론이 사라진 자리에 감정이 들어섰다
일상의 토론 문화도 비슷하다. 정치학계는 오래전부터 '정서적 양극화', 즉 정책 이견이 아니라 상대 진영에 대한 반감이 커지는 현상을 추적해 왔다. 2025년 체계적 문헌 검토는 이 현상이 일상의 상호작용을 바꾸고 신뢰와 인간적 유대를 갉아먹는다고 정리했다. 미국 케이블 TV 토론 프로그램을 분석한 연구는 실제 이견이 방송에서 사라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상대의 주장이 틀린 것이 아니라 정당하지 않은 것으로 취급되면서 불신이 굳는다는 설명이다.
원인을 소셜미디어로 단정하기도 어렵다. 한국 데이터를 분석한 리(Lee)와 로하스(Rojas)의 연구(2026년 3월호 게재)는 언론과 소셜미디어 이용이 정서적 양극화와 유의미한 관련이 없었고, 정부 신뢰와 정당 지지 같은 정치적 요인이 더 중요했다고 밝혔다. 2022년 대선 패널 연구에서는 오히려 양극화가 정치 참여를 자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반면 스탠퍼드대 등이 지난해 11월 사이언스에 발표한 실험은 피드에서 상대 진영에 대한 적대 표현 노출을 조정하자 양극화 수준이 달라졌다고 보고했다. 플랫폼 설계가 영향을 줄 수 있지만 그 효과는 맥락에 따라 다르다는 뜻이다.
거울에 비친 것
이 흐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먼저 한계를 짚는다. 사회 변화가 AI를 낳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AI는 연산 능력과 자본, 알고리즘의 발전이 만든 기술이고, 그 개발 경로는 따로 설명해야 한다. 위 연구들도 사회의 균열이 AI 이전부터 있었다는 점은 보여주지만, 그것이 AI의 등장 원인이었다고 증명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하나는 분명하다. 헐거워진 가구와 관계, 성과 경쟁에 눌린 학계, 이견이 줄어든 토론의 장은 AI가 나오기 전부터 그 모습이었다. AI는 그 틈새에 맞는 도구로 빠르게 퍼졌다. 그렇다면 "AI가 사회를 어떻게 바꿀까"라는 질문과 함께 "AI가 도착한 사회는 어떤 모습이었는가"라는 질문도 필요하다. 후자의 답은 챗봇 성능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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