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지는 기업 AI 투자 두 축…"사무는 에이전트가, 현장은 로봇이" 재편되는 엔터프라이즈 IT
- SAP·세일즈포스·오라클, 잇달아 '에이전틱 엔터프라이즈' 선언…ERP 시장 지각변동 - 레거시 시스템 재구축 비용 최대 1000만 달러 이상…AI가 비용은 낮추고 보안 부담은 키워 - 아마존 로봇 100만 대…
지난 6개월간 글로벌 엔터프라이즈 IT 업계를 지켜본 이들이라면 뚜렷한 갈림길 하나를 목격했을 것이다. 인공지능(AI)이 사무직 업무를 대체·보조하는 '에이전틱(agentic) 엔터프라이즈' 소프트웨어 시장과, 로봇이 물리적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피지컬(physical) AI' 시장이 각기 다른 속도와 논리로 분화하며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기업들의 레거시 시스템 재구축 비용과 보안 리스크는 오히려 새로운 사업 기회의 텃밭이 되고 있다.
ERP 공룡들의 '에이전틱 전환' 선언…SAP "우리는 이제 소프트웨어 기업이 아니다"
올해 5월 미국 올랜도에서 열린 SAP 연례 콘퍼런스 '사파이어 2026'은 이런 흐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 무대였다. 크리스티안 클라인 SAP 최고경영자(CEO)는 기조연설에서 "SAP는 미래에도 소프트웨어 회사로 남을 것인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뒤, 90분에 걸쳐 자사를 재고 마감·공급망 재조정·급여 처리·생산 현장 운영까지 사람 개입을 최소화한 채 처리하는 자율 에이전트 중심의 '비즈니스 AI 기업'으로 재정의했다. 이날 발표된 '오토노머스 엔터프라이즈(Autonomous Enterprise)'는 SAP 비즈니스 AI 플랫폼과 오토노머스 스위트, 조율(Joule) 워크 등 3개 층으로 구성됐으며, 224개 에이전트와 51개 어시스턴트를 5개 업무 영역에 배치한 SAP 53년 역사상 최대 규모의 AI 제품 출시로 평가됐다. SAP는 앤트로픽과의 파트너십을 확대해 에이전트의 추론 엔진으로 삼는 한편, 에이전트 기반 마이그레이션 도구로 ERP 전환 작업량을 35% 이상 줄일 수 있다고 밝혔고, 파트너 생태계 확산을 위해 1억 유로 규모의 펀드도 조성했다.
이런 공격적 행보의 배경에는 실적 압박이 자리한다. SAP 주가는 지난해 7월 306.6유로로 최고점을 찍은 뒤 3분의 1 넘게 빠졌고, 올해 1월 실적 발표에서는 클라우드 매출 가이던스가 기대에 못 미치며 2020년 이후 최대 낙폭인 하루 15% 급락을 겪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오토노머스 엔터프라이즈 전략을, 2027년 요금제 개편(무료 런타임 제공 종료)을 앞두고 아직 클라우드로 이전하지 않은 1만7000여 고객사를 AI 플랫폼 고객으로 흡수하려는 생존 전략으로도 해석한다.
경쟁사들의 움직임도 크게 다르지 않다. 세일즈포스는 '에이전틱 엔터프라이즈'를 선언하며 에이전트포스(Agentforce)가 1만8500개 기업 고객, 연환산매출(ARR) 5억4000만 달러 규모로 성장했다고 밝혔고, 마이크로소프트는 개발자 콘퍼런스 빌드에서 에이전트의 신원·접근권한·보안을 관리하는 제어 플랫폼 '에이전트 365'를 공개했다. 오라클은 데이터센터 확충에 160억 달러 이상을 조달하며 AI 인프라 기업으로의 전환에 속도를 냈고, 서비스나우는 이상 행동을 보이는 에이전트를 즉시 중단시키는 '킬 스위치' 기능을 앞세워 스스로를 'AI 통제탑'으로 자리매김했다. 업계 분석가들은 올봄 SAP·마이크로소프트·세일즈포스·오라클·서비스나우·워크데이 등 6대 엔터프라이즈 기업의 콘퍼런스를 관통한 공통 메시지가 결국 "기업이 데이터와 업무 프로세스를 담아두던 시스템이 스스로 행동하는 에이전트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었다고 짚었다.
레거시 재구축 비용은 '억 단위'로…AI가 절감해준 만큼 보안 부담은 커진다
문제는 이런 에이전트를 실제로 구동하려면 그 밑단의 낡은 기업 시스템부터 손봐야 한다는 점이다. 업계 자료에 따르면 올해 기준 ERP·메인프레임·규제 데이터가 얽힌 대규모 엔터프라이즈 현대화 프로그램의 비용은 100만 달러에서 많게는 1000만 달러 이상까지 치솟는다. 코볼(COBOL) 언어로 짜인 수십 년 된 코드나 문서화되지 않은 업무 로직을 이해하는 인력이 하나둘 은퇴하면서, 기업들은 단순히 개발자를 잃는 게 아니라 청구 규칙과 정산 프로세스, 가격 산정 로직 같은 '조직의 기억'을 함께 잃어버리는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AI는 이 부담을 일부 덜어주고 있다. 업계에서는 AI가 코드 분석과 의존성 매핑을 대신하면서 전통적 방식 대비 3040% 비용을 절감했다는 보고가 나오고, 코볼을 자바로 전환하는 AI 리팩터링의 정확도가 93%를 넘어섰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실제로 기업들의 현대화 예산 가운데 AI 기반 솔루션이 차지하는 비중은 2024년 28%에서 올해 45%로 뛰었다. 그러나 정작 ERP 관련 AI 프로젝트의 75% 이상이 기존 시스템과의 '통합 경계'에서 멈춰 서고, 조직의 3분의 2는 여전히 시범 도입(파일럿)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챗봇이나 문서 분류기 같은 '겉도는 AI'만 도입한 채 핵심 업무 시스템은 그대로 둔 '고립된 AI의 함정'에 빠진 기업이 적지 않다는 진단이다.
이런 흐름은 보안 시장의 급팽창으로 이어지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가트너는 올해 전 세계 AI 관련 지출이 전년 대비 44% 늘어난 2조5200억 달러, IT 지출 전체는 6조150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고, 이 가운데 정보보안 지출은 13.3% 증가한 2442억 달러로 전망했다. 올해 안에 전체 기업용 애플리케이션의 40%가 특정 업무를 수행하는 AI 에이전트를 포함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도 나왔는데, 이는 올해 1월 기준 5% 미만이었던 것에서 급격히 늘어난 수치다. 문제는 방어 체계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데 있다. 포레스터는 올해 안에 에이전트형 AI 도입이 원인이 된 데이터 유출 사고가 공개적으로 발생해 관련 인력의 해고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다른 AI 에이전트를 감시·통제하는 '가디언 에이전트' 시장이 2030년까지 전체 에이전틱 AI 시장의 1015%를 차지할 것이라는 전망과 함께, 낡은 시스템을 새로 짜는 프로젝트 자체가 곧 보안 사업의 기회로 연결되는 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
로봇 100만 대 넘긴 아마존…물리 AI 시장, 6년 새 10배 성장 전망
한편 사무실 바깥, 물류창고와 생산 현장에서는 전혀 다른 속도의 변화가 감지된다. 아마존은 최근 자사 물류창고에 배치한 로봇이 누적 100만 대를 넘어섰다고 밝히고, 로봇 함대 전체의 이동 경로를 조율하는 생성형 AI 파운데이션 모델 '딥플릿(DeepFleet)'을 도입해 로봇 이동 시간을 10% 단축했다고 발표했다. 촉각을 인식하는 로봇 '벌컨(Vulcan)'과 협업형 운반 로봇 '스타크(STARK)'는 유럽 지역 사업장으로 확대 적용 중이며, 자연어로 작업 지시가 가능한 차세대 '프로테우스(Proteus)'도 시험 가동에 들어갔다. 아마존은 유럽 물류센터를 로봇 중심으로 재편하는 데 100억 유로 이상을 투자하는 동시에, 유럽 내 인력을 2만5000명 늘리고 직원 재교육 프로그램에도 2030년까지 10억 달러를 투입하겠다고 밝혀, 자동화와 고용 확대를 병행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런 투자는 아마존에 국한되지 않는다. 올해 1분기 테슬라의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 3세대가 실제 생산 현장에 투입되기 시작했고, 대당 2만5만 달러 수준의 도입 비용으로 시간당 임금 노동자를 대체할 경우 로봇 한 대당 생애주기 기준 약 20만 달러의 인건비 절감 효과를 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시장조사업계는 물리 AI 시장 규모가 올해 15억 달러 수준에서 2032년 152억 달러까지, 연평균 47.2%씩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다만 아마존이 야심 차게 선보였던 인체공학적 협업 로봇 '블루제이'가 올해 2월 공식적으로 운영 중단을 알린 사례에서 보듯, 물리 AI의 실전 배치는 여전히 시행착오를 동반하는 영역이라는 점도 함께 드러났다.
두 시장의 교차점…재구축 비용과 보안 부담이 곧 새로운 사업 기회
결국 지난 6개월간의 흐름을 종합하면, 기업용 IT 시장은 사무 영역의 '에이전틱 ERP'와 현장 영역의 '피지컬 AI'로 뚜렷이 갈라져 각자의 속도로 성장하는 동시에, 그 밑바탕에 깔린 레거시 시스템을 새로 짜야 하는 공통의 숙제를 안고 있다. 그리고 그 재구축 과정에서 발생하는 통합 실패와 보안 공백은 역설적으로 소프트웨어 아키텍처 설계와 사이버보안을 함께 다룰 수 있는 사업자들에게 새로운 시장을 열어주고 있다. AI가 생산성을 끌어올리는 속도만큼, 그 생산성을 안전하게 뒷받침할 시스템을 다시 짜는 작업의 몸값도 함께 오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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